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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0-10-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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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기 50명산 클린 원정대

조선의 역사가 담겨있는 황울산 등산

기사입력 2020-10-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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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보존하고 건강한 생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활발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꾸러기 클린원장대원들이 11일 오후 봉산면 덕천리 황울산을 다녀왔다. 황울산은 난함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장동고개를 지나 극락산과 만천산을 거쳐 황울산과 용배마을로 이어지는 백두극락단맥의 끝자락 산이다.


 


 

꾸러기 50명산 클린 원정대는 2020 김천시 여성커뮤니티 지원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산행을 통해 산의 유래와 역사 및 산과 관련된 이야기뿐 아니라 쓰레기 수거, 외래 유해식물 제거 등 클린산행도 함께 진행한다.


 


 

이날 꾸러기 도전단과 보호자들은 등산에 앞서 코로나 19 발열확인과 안전 수칙 준수 및 몸풀기 체조를 마치고 257.7m의 황울산을 모두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녀왔다.


 


 

황울산(黃蔚山 257.7m 가막산, 가매기뒷산, 용배뒷산)은 옛날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에게 맹자를 가르친 스승으로 울산군수를 지냈던 황여헌(조선시대 문신, 문장가, 용배마을에 귀양살이 했다고 전함)이 산 아래 마을에 살았다하여 생긴 산 이름이다.


 


 

황울산을 가막산이라고도 하는데 가막산은 황울산 아래 태화리 봉명마을 옛 이름이 가막사(可幕寺), 감막사(柑幕寺)라는 절이 있어 가막리, 가매기로 불린데서 연유하며, 봉명마을 쪽에서는 가막산, 가매기뒷산 이라하고, 용배마을에서는 용배뒷산이라고도 한다.


 


 

현재 봉산면에서 새해 첫날 봉산면민의 안녕과 풍년 및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새해 해맞이 행사를 황울산 정상에서 진행하고 있다.


 


 

산 아래 용배(龍背)마을은 주변 마을의 산세가 용의 등과 같다하여 붙은 이름으로 마을이 용의 등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샘을 파면 마을에 해악이 미치고 물이 뒤집혀 황토물이 나온다 하여 1950년대까지 직지천 물을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황울산이라는 인물은 예지리, 덕천리, 태화리 등의 지명과 전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태평마을 뒤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은 태평산 자락 재궁골 골짜기는 호랑이가 갈대밭에서 새끼를 기르는 형국으로 후손이 발복할 천하의 명당으로 영일정씨 집안과 장수황씨 집안이 서로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했다는 것이다.


 


 

재궁골에는 태평사(太平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황씨 집안의 황울산(黃蔚山)이 명당인 절터를 차지하여 묘지로 사용할 요량으로 동짓달 그믐밤에 절 지붕에서 송아지가 울면 절이 망한다는 소문을 퍼트린 후 법당 지붕에 몰래 송아지를 올려놓았는데, 송아지 울음소리에 놀란 스님들이 차츰 떠나고 절은 망해서 황씨 집안의 소유가 됐다고 한다.


 


 

이후 정일 정씨 입향조의 장인이 후손이 없이 상을 당하자, 명당에 묫자리를 마련하면 발복이 외손으로 이어질 것을 희망하여, 태평사(太平寺) 뒷산의 명당에 묘를 쓰려 했다. 하지만 태평사 뒷산으로 가는 길목에 황울산의 집이 있어 황울산이 상여가 이동하는 길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영일정씨 문중에서 묘책을 세워 두 개의 상여를 준비해 빈 상여를 황울산이 살고 있는 집 앞으로 보내고, 진짜 상여는 추풍령을 돌아 명당터로 향했고, 황울산이 빈 상여와 씨름 하는 동안 정씨 집안에서 재궁골 명당터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영일정씨의 속임수에 화가 난 황울산은 정씨 집안이 묘지에 세운 6척의 비석을 주먹으로 쳐 두 조각 내 버렸고 이후 황씨 집안은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몰락하였으며, 정씨집안은 대를 이어 번성했고, 몰락한 황울산의 집터는 연못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연못이 황울산 집터의 전설이다.



 


 

용배마을에서 태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원래 즐거울 락()자를 써서 낙고개(樂峴)였는데, 예로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로 과거 보러가는 선비들이 이 고개를 주로 넘어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명당의 맥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 고개로 넘은 과거 응시자들 중 낙방자가 속출했고, 이후부터 현재의 국도방면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고개이름도 떨어질락()자를 써서 낙고개(落峴)가 되었다고 전한다.

 











 

 

 




















 

김문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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